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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학·취업 시즌에 만난 사람, 한태혁(우리사이공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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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134회 작성일 19-11-0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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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주먹으로 시작한 감동적인 진학·취업·창업 이야기! ‘금수저가 아니라도, 꿈을 갖고 도전하라’는 강력한 메시지

 

본지는 이번에 기획 기사로 ‘진학· 취업 시즌에 만난 사람’이라는 기사를 준비하게 됐다. 이번에 소개하게 된 ‘진학·취업 시즌에 만난 사람’ 한태혁씨는 여러 모로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이 분을 만나고 나니, 진학이란 어떤 것인지, 취업이란 뭔지에 대한 상이 잡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주얼리 분야에서 창업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모습이 그려지게 됐다. 사실 주얼리인 치고 ‘진학’ ‘취업’ ‘창업’이라는 것들에 대해 연관이 없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누구나 다 이러한 문제들이 대부분 화두가 되어 있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본지가 그에 대한 대안으로 이같은 기사를 준비하게 됐다.
여기서 더 나아가 독자들 중에 이 기사를 통해 주얼리 업계의 미래에 대한 뭔가 잔잔한 희망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겠다. <편집자 주>


■ 2018년 4월 2일 창업을 하다

 주얼리업 창업에 필요한 건 자금보다 ‘실력’

 직장생활로 모은 100만원으로 창업, 1년도 안 돼 월 매출 2천만원 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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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혁씨는 2018년 4월 2일 창업을 한다.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여서 회사 대표는 창업 멤버인 윤서진씨가 맡았다. 사무실로 신월동 지역 옥탑방 월세집을 얻었는데, 월세는 35만원이었다. 귀금속 세공 작업대 두 대가 들어가는 매우 좁은 공간이었다.
이렇게 창업하는데 모두 100만원이 들어갔다. 창업이란 게 사무실 마련하고, 작업대와 제반 공구, 그리고 자재인 일정량의 은을 구매하는 게 전부였다. 창업 모토가 처음부터 빚없이 하자는 것이었는데, 다행이 그 목표를 백분 달성하게 되었다.
그는 귀금속 산업이 매우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이라는 것을 이 때에서야 깨닫게 되기도 했다. 펜이나 붓, 그리고 종이만 갖고도 예술품이 만들어지듯, 귀금속 제품들도 약간의 도구와 재료만 있으면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업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차츰 일이 많아지고, 돈도 더 모으게 되자 지난 해 11월 문래동으로 이전을 했다. 20평 남짓되는 제법 큰 공간이었다. 왁스 사출기, 광택기, 3D프린터와 같은 장비도 갖추게 됐다. 이같은 장비들을 마련하는데 약 1천여 만원이 더 들어갔다. 창업 멤버들 입장에서는 꽤 큰 투자를 하게 된 셈이었다.


‘빚없이 창업하자’는 모토 달성
딱히 오프라인 매장을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보니 자연스레 판매는 인터넷을 이용하게 되었다. 그는 인터넷 오픈 마켓으로 ‘아이디어스’라는 핸드메이드 전문 마켓을 선택하게 됐다.
그리고 제품 콘셉트는 천연석이 세팅된 주얼리와 동물형상의 주얼리 제품으로 주된 콘셉트로 잡았다. 그런데 지난 해 8월 론칭한 ‘아이디어스’ 온라인 마켓 매출이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객들 중에는 이 제품들을 직접 보고 고를 수 없는지에 대한 문의도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주말 야간에만 열리는 ‘여의도 밤도깨비 야시장’에 입점하게 됐다.
디자인은 주로 윤서진씨가 맡았고, 세공은 한태혁씨의 역할이었다.
그러다보니 한태혁씨는 매일매일 퇴근 후 밤 늦게까지 세공일에 매달려야 했다. 주문이 많이 쏟아지던 기간에는 거의 2시간 이상을 자지를 못하고 출근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급기야 할 수 없이 얼마 전부터 직장생활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게 됐다.
현재에도 주문은 계속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서서히 멤버를 늘리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새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꼭 실무능력까지 갖출 필요는 없다. 기초적인 수준만 있으면 충분히 가르치면서 기량을 쌓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현재 매출은 인터넷을 통해서만 약 월 2-3천 만원 매출을 달성하고 있다. 처음에는 실버 제품만 취급했었는데, 요즘은 원하는 고객이 있을 경우에는 합금 제품들도 출시하고 있다.


이장우 기자


■ 2017년 11월 취업을 하다

 실기 위주 대학 생활 큰 힘, 직장과 창업 병행

 급여 아껴 창업 자금으로, “세공을 해봐야 캐드도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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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과정의 폴리텍대학교 강서캠퍼스 생활이었다. 그래서 2학년 2학기부터는 대부분 현장 실습을 나가게 되는데, 그는 11월에 아예 취업을 하게 됐다. 캐드 부분에 입사하여 다음 해 10월 퇴직까지 만 2년여의 직장생활을 경험하게 됐다.
첫 급여는 최저 임금 수준의 170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퇴직 무렵에는 230여 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 정도 급여 수준은 동기들에 비해서는 약간 높은 수준이었다. 그 사이 직장은 두 번이나 옮겨 다녔다. 한번은 타의에 따른 것이었고, 한번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세공의 연장선이 캐드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세공을 알아야만 캐드가 잘 된다는 것이다. 세공을 모르면 디자인을 할 때 ‘광(光)’ 작업의 의미를 반영하기 어렵다. 그렇게 세공작업을 모르는 채 캐드 디자인이 이뤄진 제품은 ‘광’ 작업의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실제 주얼리 제품이 만들어졌을 때 어느 부분에서는 그늘이 생길 수 있게 된다.
세공작업의 효율성을 위해서도 캐드 작업은 크게 영향을 미친다. 즉 줄질이나 칼질과 같은 기본적인 세공 작업들이 용이하도록 캐드 작업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 이같은 세공작업에 대한 이해가 없이 캐드가 이뤄지면 세공팀은 더욱 힘들게 작업을 하게 마련이다.
능률이 오르기 어려운 것이다.
대학 생활에서 캐드의 기본을 충분히 익혔기 때문에 그의 직장 생활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2년여의 짧은 직장생활이었지만, 실질적인 주얼리 시장과 소비자들의 요구를 이해하게 되는 기간이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자기 사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의 직장생활은 누구보다도 바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철저히 업무는 구분해서 진행했다. 야간에 아무리 잠을 자지 못했다 하더라도 직장에서의 업무는 빈틈없이 진행하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그는 무엇보다 일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직장에서나, 퇴근 후의 작업 과정에서나 그러한 힘든 과정을 무리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 2016년 3월 폴리텍대학교에 진학하다

 “대학 2년 동안 주얼리 제조의 모든 것 배워버리자!”

 독하게 야간 늦게까지 실습 매달려, 덕분에 교수님들도 늦게까지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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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5년 5월 군 제대 후 폴리텍대학교 주얼리디자인과를 접하게 된 것을 지금도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2012년 서울의 일반고를 졸업했을 때, 그는 딱히 진학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본인은 문과 성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이과를 선택하여 고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막연히 이과에 가면 대학 진학도 쉽고, 취직도 잘된다는 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진학 시기가 왔을 때 그가 원하는 학과가 전혀 떠오르질 않았다. 게다가 가정 형편도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후 입대를 할 때까지 다양한 일들을 섭렵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형태로 요식업, 콜센터와 같은 직장을 전전했다. 그가 군대 전역 후 주얼리학과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은 순전히 한 친척의 한 마디의 말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 책상이나 의자는 자기가 만들어 쓰는 타입이었다. 이런 얘기를 들은 한 친척이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한번 주얼리 제품을 직접 만들면 어때 하고 말하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전역 후 뭘 할지 몰라서 난감해하던 그가 인터넷을 통해 주얼리 학과를 찾아보게 된 계기였다. 마침 안성에 있던 폴리텍대학교가 서울 강서 캠퍼스를 확보해 이전해 왔고, 이 학교에 주얼리 디자인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노동부가 운영하는 현장 중심의 대학이며 학비도 타 대학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는 사실도 눈에 확 들어 왔다.

늦게야 발견한 꿈을 이루기 위해
진학 후 그의 학교 생활은 다른 동기들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재학 기간 동안 주얼리의 모든 것을 확실히 익혀야 한다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낮에 배운 내용이 손에 잘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는 꼭 야간 늦게까지 작업을 반복하곤 했다. 학교가 전체적으로 문을 닫는 10시, 11시까지도 연습에 매달리곤 했다.
이러한 그에게 교수님들과 학교 측은 전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학교는 학생이 남아서 공부를 하게 되면 엄격하게 교직원이 대동해주게 돼 있었다.
그래서 교수 중 한명은 꼭 저녁 늦게까지 남아 그의 연습을 거들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에겐 그의 동기들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다수의 동기들 중 그처럼 저녁 늦게까지 연습을 하는 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다보니 선생님들에 대한 미안함은 약간은 반감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세공의 모든 분야에 대해 충분히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캐드 디자인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교외 학생들로 구성된 캐드 스터디 그룹에도 참여했다.
폴리텍대의 아낌없는 지원
특히 학교는 학생들에 대해 세심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립 학교여서 모든 실험 기자재는 학교에서 지급해 주었다. 기본적으로 1인 1 컴퓨터 시스템이 돼 있고, 귀금속 세공 작업대도 각각 제공됐다. 3D 프린터 등 기타 기자재도 충분히 구비돼 있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원없이 주얼리 제조의 모든 것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교수진도 이론 뿐 아닌 실기까지 다 정통한 분들이었다. 자체 교수진들뿐 아니라 업계의 주얼리 제조 기술이 탁월한 초빙 교수들로 구성돼 있었다.
아울러 이 학교는 입학할 때부터 팀제로 학업과정이 이뤄졌다. 10명의 학생들에 1인의 교수가 같이 팀을 이루는 체제다. 한태혁씨는 이 체제가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어떤 과제를 공동으로 진행할 때에 그 과제의 전 과정을 한 사람이 모두 다 잘 할 수는 없게 마련이다. 그러면 각자가 자기가 잘하는 능숙한 부분을 맡아 과제를 이행하고, 나머지는 기량이 앞서 있는 사람을 통해 기량을 더욱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 생활 전체를 팀제로 진행하다보니, 그러한 생활은 사회 생활 할 때에도 크게 도움이 됐다. 업무를 독단적으로 혼자 풀기보다는 협업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몸에 배이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졸업 시기보다 좀 일찍 사회 생활에 발을 디뎠을 때 여러 면에서 그는 사회에 뛰어들 준비가 거의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 인터뷰 | 한태혁씨와 공동창업한 「우리사이공방」 윤서진 대표

 “월 400여개 제품 인터넷 판매, 연 매출 2억 넘겨”

 창업 2년차, 부모 지원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만 시장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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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이공방」 이 창업을 한 건 2018년 4월 2일이었어요. 그래서 회사 이름도 ‘우리사이공방’이라고 지었죠”

「우리사이공방」 윤서진 대표의 첫 판매처는 목동의 한 복지관이 주최하는 장마당에서였다. 이 자리에 주말이면 인근 사람들이 각자 제품을 들고 나와 좌판을 벌이곤 했다. 한데 이 곳에서 쏠쏠하게 제품 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좌판의 제품들을 보고 커플들이 목걸이나 반지 등을 주문하면 만들어서 건네주곤 했다.
그러다가 이 회사가 핸드메이드 전문 인터넷 쇼핑몰 ‘아이디어스’에 제품들을 론칭한 것은 지난 해 8월이었다.

“처음엔 물건들이 거의 나가지 않더라고요. 한데 묘하게 특정 제품군들이 계속 잘 나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방향으로 계속 제품을 만들어 올리게 됐죠.”

쇼핑몰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직장과 사업을 병행하는 게 더 이상 쉽지 않게 됐다. 그래서 직장을 다닌지 1년여 만인 2018년 10월 경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이후 오로지 주얼리 마케팅에만 집중을 하게 됐다. 그로부터 또 1년여가 지나고 있다.

“현재 인터넷 마켓을 통해 월 단위로 팔려나가는 주얼리 제품 숫자가 약 400여개 정도 됩니다. 그리고 지난 1년여 기간 동안 총 1,500여 명이 최소 1가지 이상의 제품을 우리로부터 구매한 것으로 나오고요.
그리고 2,700명이 인터넷 상의 우리 제품에 ‘좋아요’라는 공감을 표시했는데, 그 중 400여 명이 후기를 남긴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론칭한 제품 중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한가지 종류만 약 860여개 팔린 것으로 나옵니다. 올 들어 현재까지 매출액은 총 2억여 원을 넘는 것으로 보여지고요.”

윤 대표 또한 한태혁씨와 학번과 학과가 같은 폴리텍대학교 16학번 출신이다. 그의 경우엔 대학을 두 번 다닌 경우다. 예고를 졸업한 후, 첫 대학에서 도예과를 지망했는데, 졸업 후 취업이 안돼 써먹질 못하고 있다가 다시 폴리텍대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폴리텍대학교 학과 과정이 매우 빠듯하더라고요. 강좌가 보통 4시간 과정인데, 과의 특성상 작업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이수해야 할 학점이 많아서, 보통 힘든 게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2년여 동안 관련 과정에 어느 정도 눈을 뜰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졸업반이었던 2017년 11월경 해외에 마운팅(스톤을 세팅하는 주얼리의 몸체 부분) 제품을 수출하는 비교적 큰 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굉장히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수출을 하는 회사여서 해외 시장의 흐름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시야가 열리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내 제품을 마음껏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 한계점이었다. 급기야 쇼핑몰 매출이 서서히 늘기 시작할 무렵 취업 후 1년여 만에 회사를 그만 뒀다.

“일주일에 2-3번은 시장 조사를 나갑니다. 동대문, 남대문, 백화점들을 돌아다녀요. 그러다보면 트렌드가 눈에 잡혀요. 특히 해외 명품들을 보면 대단한 것 같아요. 제품들을 보면 기포 하나 없을 정도로 마무리가 깔끔해요. 우리도 그러한 주얼리를 만들어내는 게 이후의 목표입니다.”


■ 취재 후기

“우리 업계에 아직 희망은 있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우리사이공방’을 창업한 두 젊은이들이 ‘빚없이 창업을 하자’라는 목표를 세웠다는 부분에서 매우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특히 주얼리 업종에서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뜻밖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창업을 하면서 가족을 포함한 주변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던 여건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보란 듯이 서서히 매출을 키워나가고 있다. 창업 2년차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구조적 불황 속에서 수십년의 업력을 갖고 있는 주얼리 업체들도 다들 힘들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업계인들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참으로 경이롭고 기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과연 이들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무엇보다 대학 진학 과정이 남달랐다. 이들에게 대학은 누구나 다 가는 대학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대학은 뭔가 대학 시절에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절실한 목표가 있었다. 그게 그들의 동력이었다.
그렇게 절실히 원했기에 실력을 기를 수 있었고, 그 실력을 바탕으로 창업이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리고 직장 생활이 힘들었어도 버텨낼 수 있는 동력이 됐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진학, 취업, 창업의 선순환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우리 업계인들도 이들을 통해 당면한 어려움을 이겨나갈 희망과 동력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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