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조명/ 황갑주 장인 '서거'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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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6-04-27 21:37본문
귀금속 전승공예 '큰 별' 지다
4월 14일 영면, 향년 87세, 전승 공예 거인으로 큰 족적 남겨
“정신은 또렷했고, 손끝은 살아 있었다”
평생을 귀금속 전승공예에 바쳐온 황갑주 장인이 지난 4월 14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그의 갑작스러운 부고는, 주얼리 업계를 깊은 충격과 슬픔 속으로 몰아넣었다.
평소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여전히 정정했고, 정신은 또렷했으며, 손끝은 살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입문 80주년 작품전을 준비하고 있다던 그의 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해진 비보는, 그를 통해 열렸던 한 시대가, 이윽고 막을 내렸음을 실감케 한다.
그의 삶은 단순한 한 장인의 생애가 아니었다.
한국 귀금속 전승공예의 전대미문의 잊을 수 없는 전설로 남게 되었다.

황 선생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빈소 모습
■ 장인을 넘어선, ‘대인(大人)’의 삶
예술가·사업가· 업계 리더… 다층적 삶의 궤적
황갑주 장인의 삶을 단순히 ‘장인’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의 인생은 예술가로서의 길 이외에도 사업가, 업계 리더, 사회 봉사자라는 여러 층위가 겹겹이 쌓여 있는 복합적 궤적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1954년 만 15세 소년의 나이에 귀금속 공장 견습생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타고난 손재주와 성실함으로 단기간에 기술을 습득했고, 20대 초반에 이미 순금, 백금, 보석 조각 등 주얼리 전 분야를 섭렵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23세에 벌써 공장 운영을 맡으며 경영자로서의 길에 들어섰고, 30세 무렵에는 50여 명 규모의 공장을 이끄는 업계의 중견 사업가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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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세에 열린 <입문 70주년 회고전> 때, 선생님께서 소장작품들에 대해 설명하고 계시다. 이때까지도 무척 총기가 뛰어나셨고, 정정하셨다.
▶ 신의로 완성된 경영, 대인의 풍모
그의 사업을 관통하는 한 가지 가치는 언제나 ‘신의’였다.
젊었을 적 많은 신세를 졌던, 한 거래처 사장이, 그에게도 막대한 손실을 끼치고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추었는데도, 그를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가게를 인수해 떠안았던 일화는, 지금까지도 업계에 회자된다.
이 같은 대인의 품격으로 그의 사업은 안정적으로 성장했고, 50여 년이 지나 동생에게 사업체를 물려주기까지, 큰 굴곡 없이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 업계 최초 단체,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창립 주도
황 장인은 개인의 성공에 머물지 않았다.
20대 초반 ‘영우회’를 결성했고, 이 단체는 이후 업계 최초의 단체인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그는 당시로서는 난제였던, 소매점 업계와의 공임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공모전 개최와 업계의 기술 도입을 활성화 해, 오늘날 주얼리 산업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서정춘 시인 작 '황갑주론', 장사익 쓰다
▶ 사회를 향한 봉사와 생활 정치의 삶
그의 삶은 공동체를 향해 언제나 열려 있었다.
국제라이온스 활동을 통해 시력 회복 사업을 주도하여, 65명의 환자에게 새 광명의 삶을 선물했고, 재해 구호, 환경 보호, 복지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헌신했다.
또한 용산구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복지와 예산 효율화를 위해 애쓰기도 했다.
■ 입문 70년 장인의 길
전승공예의 거인이 되다
황 장인의 전승공예 장인으로서의 여정은 20대 중반부터 본격화됐다.
중요무형문화재 조각장에게 전통 금속공예를 사사 받았고, 이후 서예와 문인화까지 익히며 예술적 지평을 확장했다.
밤을 새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쌓아온 수련의 과정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지탱하는 근간이 됐다.
▶ 작품 하나하나에, 자신의 삶을 바치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었다.
사리장엄구, 은잔, 화병 등 대표 작품들은 하나를 완성하는 데 수개월에서, 길게는 10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고난도 작업의 결과물들이었다.
문양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가차 없이 녹여버리는 완벽주의는,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무결점의 경지’를 보여준다.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이어간 그의 손길은, 세상에 유일무이한 분신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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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부여왕흥사지목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구> 재현 작품. 이런 기념비적인 작품들은 하나 제작하는데 5-10개월씩 걸렸다.
▶ 법고창신, 전통을 현대로 끌어오다
황 장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철학은 ‘법고창신’의 정신이었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이 창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전통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과거의 형식을 현재의 언어로 다시 해석하고, 그 위에 자신의 시대를 덧입혔다.
이 과정에서 전승공예는 과거에 머무는 기술이 아니라, 현대와 연결되는 살아 있는 문화로 확장됐다.
▶ 종합 예술로의 승화
황 장인은 문자투각 기법을 창안하며 공예와 서예의 경계를 허물었다. 문인화까지 아우르며 그의 작품은 금속을 매개로 한 종합 예술로 확장됐다.
그리고 그는 틈틈이 동양철학과 한학에도 심취하여, 작품 하나하나에서 깊은 사유가 느껴진다는 평을 받게 됐다.

<노심초사국가안위 勞心蕉思國家安危> 안중근 의사 어록, 선생님이 창안한 문자투각 작품. 붓글씨에도 능하셨다.
■ 남겨진 과제: 황 장인의 유지를 어떻게 이을 것인가
“국가에 기증해, 후대에 남기겠다”던 간절한 염원
입문 70주년 회고전에는 7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그 중 50여 점은 제작에 수개월 이상이 투입된 대작들이었다..
그 동안 황 장인은 이 작품들을 국가에 기증해, 후대에 남기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가 꿈꿨던 것은 후손들이 전통을 직접 보고 배우는, ‘살아 있는 역사의 전승’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평생을 다해 재현해 놓은 역사가, 그리고 유물들이 외진 골방이나 창고에서 잊힐지 모른다는 우려가 깊다.
과연 국가에서 이러한 그의 염원을 거두어 줄 것인가.
아니면 어느 독지가가 나서서 그의 간절한 바람을 이뤄줄 것인가.

가야 시대 주전자, 잔
한편 그는 지난 24년 10월 열린 ‘입문 70주년 회고전’을 마치자마자 바로, ‘입문 80주년 작품전’을 준비하겠다는 각오를 피력한 바 있다.
한 지인에 따르면 “이를 위해 지난해에도 계속 작업을 진행해 왔고, 최근에는 추가로 새 작품 제작에 들어가겠다며 순은 1kg을 구매해 놓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입문 80주년 작품전’에서 아직까지 미진했던, 고조선 시대의 유물을 다수 재현하여, 우리나라 귀금속 5천년의 역사를 완성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업은 이제 꿈으로만 남게 됐다.
과연 그 누가 그 꿈을 이어갈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의 전승공예 기술을 온전히 잇겠다고 나선 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전승공예를 잇는 작업은 정말 외로워. 그 누가 생계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고...
고인이 생전 혼잣말처럼 되뇌던 이 말은 오늘날 우리 업계가 마주한 뼈아픈 현실이다.
장인의 기술과 정신을 온전히 잇겠다는 전수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빈자리는 더욱 커 보이기만 한다.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던 황갑주 장인.
이제 그가 일궈놓은 찬란한 역사를 보존하고,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오롯이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다.
전승공예의 별은 졌으나,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시대를 비추고 있다.
국가 기증을 통해, 후대에 역사의 뿌리를 물려주려 했던 그의 거룩한 유지가 온전히 실현되어, 고인이 천상의 세계에서 아무런 미련 없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황 선생님의 작업 모습. 쓰러지시기 직전까지도 끝까지 작업에 매달리셨다.
정이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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