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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특집/ 귀금속 전승공예의 거장, 황갑주 장인의 삶과 작품 세계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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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192회 작성일 24-12-23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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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대 예술가의 치열한 삶의 여정

사업 및 주얼리 단체 활동 영역 등에서도 큰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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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은잔 은대를 제작하고 있다.


귀금속보석 전승공예 입문 70주년 회고전은 현대 한국이 낳은 대 예술가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계의 예술가들 중 이같이 길게 정열적으로 작품 활동을 계속 해온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황갑주 장인은 벌써부터 입문 팔십주년 작품전을 기획하고 있다.

 

현재의 몸 상태로 봤을 때, 아직도 한 십년은 너끈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1년에 최소 한편 이상씩은 더 남겨야지.” 

그는 역사를 잊는 민족은 미래란 없다라는 신채호 선생의 말을 언제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우리나라 귀금속 전승 문화가 하나둘 사라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재현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다.

특히 황 장인의 전승공예 기술을 이어받고자 하는 제자를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더 조바심을 낸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된 인간문화재 추천 제의도 고사했다. 정부 지원을 받으면 작품 활동 이외에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향년 86세를 바라보는 황 장인의 삶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끝없이 정진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전승공예 일 이외에도 모든 부분에 걸쳐 언제나 확연한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주얼리 사업도, 업계를 위한 단체활동도, 어려운 이를 위한 봉사활동도, 지방자치 의정활동도...

 

황갑주 장인의 사업 이야기

대인의 풍모로 신의를 지키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못했다. 하지만 신앙심이 두터운 아버님의 뜻에 따라 천주교 성당 복사(사제를 돕는 시종) 일은 6년 동안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이번 회고전 도록 후미에 황갑주 장인의 짧은 자서전이 수록돼 있다. 그 자서전에 소개된 일화다.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맡겨진 소임을 끝까지 다하고자 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5세 되던 54년부터 귀금속 세공 보조공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타고난 총명함과 성실함으로 빠르게 주얼리 세공 기술을 섭렵했다.

20대 초반에 이미 순금일, 18금일뿐 아니라, 백금일, 보석 조각 일까지 귀금속 관련 거의 모든 기술들을 다 배우게 됐다. 그래서 만 23세 되던 1962년에 공장 사장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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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 보석함 

 

30세에 50여 명 규모의 공장 운영

모시고 있던 사장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 황 장인에게 공장 인수를 권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일정한 부채를 지게 됐다. 적지 않은 부채였지만, 그는 공장에서 침식을 같이 하면서, 거의 밤새도록 일을 해, 공장 시작 후 만 4개월여 만에 부채를 다 갚았다고 한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일본 관광객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그의 공장에서 만든 화이트골드 주얼리들과 보석 세팅 주얼리들이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금새 공장 인원은 23명 규모로 커졌다.

1969년 미도파, 롯데, 코스모스 백화점 귀금속 점주들의 성화로 제2공장이 생기면서 공장 직원만 50여명으로 불어났다. 불과 30세 나이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결코 신의를 잃지 않았다.

그의 공장의 가장 큰 소매점 거래처가 있었다. 그가 공장을 인수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5년여 간 이어져온 거래 관계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됐다.

그 소매점 점주가 수많은 빚을 남기고 갑자기 사라졌다. 그의 피해가 가장 컸다. 화이트골드 70, 30, 백금 25, 공임 2천여 만 원이었다.

 

소매점 고객에게 큰 돈 떼였지만 신의 지켜

수많은 피해자들이 야반도주한 점주를 찾아 나서고,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그 점주가 운영하던 빈 가게를 인수하기로 작정했다. 

피해가 크긴 컸지만, 그는 그 동안 보여준 점주의 호의를 더 고맙게 생각했다.

이같은 대인다운 기질과 넉넉한 인심, 특유의 친화력들이 모아져 그의 공장은 물론 전체 사업은 꾸준히 성장했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1984년 그의 공장은 정부로부터 한국 보석 공예품 업소로 지정되기도 했고, 롯데 면세점 입점도 할 수 있었다. 주얼리 업체로서는 눈부신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업 욕심은 크지 않았다. 그의 삶의 또 하나의 축은 전승 공예를 위한 정진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20대부터 그는 수시로 전승공예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외에 업계를 위한 단체활동, 라이온즈 활동과 같은 사회 봉사활동, 지방 자치 의원 활동도 그의 삶에서 큰 영역을 차지했다.

이윽고 마침내 2003년 그의 막내동생 갑운씨에게 공장을 물려주면서, 사실상 주얼리 사업을 접게 된다.

통산 50여년의 사업 기간을 돌아보면, 공장 직원들을 관리하고, 고객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는 언제나 순리대로 일을 풀어나갔다.

그러다보니 사업 기간 내내 큰 화 없이,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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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동당초문 통반지 

 

황갑주 장인의 주얼리 단체 활동

업계 최초 대표 단체 기술협회창립 주도

 

황갑주 장인은 우리나라 주얼리 업계 발전을 위해서도 큰 획을 그었다. 우리나라 주얼리 단체의 효시를 이룬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이하 기술협회) 발족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75년 기술협회 발족은 1961년 발족된 영우회(永友會)가 모태가 됐다. 이 모임 결성을 주도하여 초대 회장이 된 황 장인의 나이는 22세였다.

이 모임은 당시 국내 최대 주얼리 집산지였던 남대문과 명동의 주얼리인들의 친목 단체였다.

이후 이 모임은 서울지구귀금속친목회로 발전했고, 1966년에는 (가칭)서울귀금속가공연합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주얼리 공임 인상을 놓고 공장들과 소매점들간 갈등이 심했다. 이 모임은 공장들의 대변 단체였다.

당시 황 장인은 귀금속 집산지가 포함된 서울 남부 지역 지부장으로 활동했다. 공임 협상 과정에서 공장들 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드디어 1975년 기술협회가 창립됐다. 그런데 협회 창립과정에서 비 귀금속인이었던 사무국장이 자신을 초대 이사장으로 등재하여 신고해버리는 해프닝(우연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할 수 없이 황 장인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실질적인 재단 이사장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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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정 목걸이 팔찌

 

기술협회 창립 후, 공임인상 협상 순탄

 

기술협회 창립 이후 다행히 소매점 업계와의 공임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연례적으로 되풀이됐던 상호간 충돌 수위도 점차 잠잠해졌다.

기술협회는 우리나라 주얼리 제품 디자인 및 기술 증진의 토대를 닦기 위해, 1977년부터 귀금속보석공모전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모전은 오늘날까지 매년 개최돼 오고 있다.

1979년엔 한 달여간에 걸쳐 귀금속 보석 선진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을 방문했다. 시장 조사와 기술 견학을 위해서였다.

이 때 황 장인은 GIA 본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나라도 다이아몬드 감별기와 같은 정밀 기기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 자리에서 다이아몬드 감정기, 보석 감별기. 이와 관련된 보조기구들을 매입하여 한국기술협회로 발송하는 수속을 밟았다.

그가 주도하여 결성한 기술협회는 1995년 한국귀금속보석단체장협의회가 만들어질 때까지 20여 년간, 업계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단체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내년에는 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이 단체는 현재에도 업계의 원로 단체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K골드 이문규 대표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라이온스 단체와 함께 펼친, 사회봉사 활동

실명 위기 65명 환자들에게, 광명의 새 세상 선물

 

황갑주 장인은 국제라이온스협회 한국 지구와 함께 봉사 활동을 열심히 했다. 1977년 가입하여 1992년까지 15년간 활동했다.

그가 살고 있는 용산구와 강남구, 동작구 등이 포함된 D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벌였다. 보통 각 지구의 클럽을 새로 확장하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는 1984년 한해에만 모두 3개의 클럽을 확장할 정도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라이온스 활동 기간 중 가장 값진 활동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업이 있다. 바로 서울시 시민들 중 시력을 잃을 위기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 시력을 찾아준 일이었다.

1983년 이 사업을 주도하여 당시 3250여 만원의 기금을 조성했다. 그래서 65명의 환자들에게 광명의 새 세상을 선물하는데 기여했다.

이외에도 그는 취약지역 무의촌 진료활동, 재해 재난 지역 이재민 구호 활동, 무의탁 어린이와 노인들을 돕기 위한 활동, 환경 보호 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 활동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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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 세트 

 

지방 의회 의정 활동 전개

지방자치 시대에,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

 

황갑주 장인은 우연한 계기로, 용산구 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됐다. 당시 그가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용산구 청파산악회 주최로, 199411월 제1회 노인큰잔치를 열었다.

이 잔치에 330여 명의 노인들이 몰려와 대 성황을 이루었다.

이 과정을 유심히 본 해당 지역 국회의원이 그 다음해 열리는 구의회 선거에 출마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는 처음에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국회의원의 집요한 요청에 할 수 없이 수락했다.

그는 용산구 의회 2, 3대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됐다. 이미 그는 라이온스 활동 이외에도 보이스카웃연맹 지역 위원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진행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용산구의 복지 정책 및 효율적인 지역 사회 개발 분야를 중심으로 의정활동을 진행했다.

지역 유아, 청소년, 노인복지 전반에 걸쳐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막고, 정책 및 예산 집행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했다.

현재에도 그는 지역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풍요롭고 효율적인 지역 살림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는 데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도록의 그의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좌우명이 소개돼 있다.

 

심무루(心無累): 마음에 더러움이 없다

자탁(自琢): 좋은 옥이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보석이 될 수 없다

과욕초화(過慾招禍):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초래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자

종덕수복(種德受福): 덕을 심으면 복을 받는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이 정신 그대로 살기 위해 하루하루 끊임없이 정진해 온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주얼리 사업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열정을 다해 살았다. 업계를 위한 단체활동, 라이온스 활동, 지방의회 활동 과정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그는 전승 공예 분야에서뿐 아니라, 인생의 전 과정에서 큰 궤적을 남기는 삶을 살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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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 돌 기념, 부인 반경식 여사(2010년 작고)와 함께. 황 장인은 슬하에  2남 1녀(기연씨, 주연씨, 준희씨)의 자녀를 두고 있다.

 

정이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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