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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과 인생] 황갑주 한국귀금속전승공예 장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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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1,733회 작성일 19-04-2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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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 한국 귀금속 전통의 멋과 맥 잇겠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정신으로 삼국~조선시대 유물 재창조 

75년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설립, 첫 보석세공전시회 열기도

황갑주 한국귀금속전승공예 장인은 6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전통귀금속공예에 지독한 장인정신으로 매진해 왔다. 사라지고 잊혀지는 전통문화를 이 시대에 다시금 살아 있는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의 예술혼을 불어넣어 살려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탁 은잔과 같이 왕가나 불가에서 쓰이던 옛 시대의 물건들이 그의 손길을 통해 작품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황갑주 장인은 또한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를 만들어 귀금속산업의 발전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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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귀금속공예의 싹을 틔우다

저전(楮田) 황갑주 한국귀금속전승공예 장인(한국귀금속전통공예연구소 대표)은 16살 되던 1954년 순천에 있는 보석당 세공보조공으로 귀금속보석업계에 입문했다. 해방과 6.25 등 격변의 시대에서 6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기술을 배우면 굶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세공기술을 배우게 됐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 배운 기술이 그를 예술가의 길로 이끌게 된 것이다.

손재주와 눈썰미가 좋았던 그는 남들보다 몇 배 빨리 일을 배우고 해 냈다. 그러자 사장이 구례와 벌교에 파견을 보내 세공 뿐 아니라 영업까지 일을 시켰다. 이래서는 사장한테 이용만 당하겠구나 싶어서 서울의 신세계백화점으로 올라와 순금, 백금, 보석 등 세공일을 했다.

그 당시까지는 가락지, 비녀 등 조선시대에 쓰이던 장신구들도 여전히 쓰이던 추세여서 그는 이러한 제품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20대 초반 일하던 공방 보영사를 인수하고, 승승장구하던 20대 후반을 보내면서도 그는 전통공예를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제 분야에 있어서는 뭐든지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황갑주 장인은 전통귀금속공예를 배우게 된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그러나 황 장인이 전통공예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부터도 전통문화가 사라져가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에 전통공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 것일 게다.

그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 김정섭 중요무형문화재 35호 조각장에게 금속공예전통기법과 조각기술을 전수받았다. 이 뿐 아니라 1982년부터 1990년까지 김충현, 김창섭 서예가에게 서예를, 홍신표 한국화 화가에게 문인화를 배우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불교와 유교, 한학 등 우리 조상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작품으로서 풀어내게 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금속공예 유물을 재현하고 조선시대 노리개, 장도, 비녀, 반지 등을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다. 황갑주 장인의 작품들은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 말을 되새겨 황갑주 장인은 전통 유물들을 재탄생시키고 있다.

또 황갑주 장인은 우리 문화유적의 체험을 위해 매년 중국 등에 다녀온다. 그의 역사와 예술에 대한 탐방과 탐구는 지칠 줄을 모른다. 지난 2015년 11월 ‘황갑주 장인 한국귀금속전승공예 입문 제61주년 회갑작품전’을 연 황갑주 장인은 오는 24년 열릴 '입문 70주년 고희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

제61주년 회갑작품전에서는 2000년 문화유산인 고구려·백제·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 시대의 국보급 유물 재현작품과 남녀 신변장신구, 불교사찰의 사리구, 은(銀) 문자투각 등 300여 점을 선보였다. 전시 도록인 ‘한국귀금속문화 2천년: 한국 귀금속 문화 전통의 멋과 맥을 잇는다’를 펴내기도 했다.

고희전에서는 중국에 남아있는 고조선의 유물들을 재현해 장엄한 5000년 역사와 예술의 멋과 맥을 펼쳐 보일 계획이다.

“더 오랜 시절의 우리 민족의 예술혼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앞으로 우리 예술과 삶이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작품에 몰입하고 또 몰입하게 하는 힘이 돼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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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금속기술협회 창립…국내 첫 귀금속세공전시회 열어

황갑주 장인은 보영사를 인수한 23살 당시 영우회라는 귀금속업계 친목모임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남대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영우회가 다른 지역의 친목모임과 합쳐져 서울지구귀금속기술인친목회로 발전하게 됐다. 더 나아가 황 장인은 서울지구귀금속기술인친목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던 1975년 5월, 재단법인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이하 귀금속기술협회)를 설립하게 된다.

그는 귀금속기술협회 초대 명예회장으로 5년간 활동하면서 1977년에는 한국 최초로 귀금속세공작품전시회를 개최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미국 산타모니카에 소재한 GIA 본부를 직접 방문해 국제 귀금속시장을 조사하고, 귀금속보석 제조기술을 배웠으며 보석 감정기·감별기 등을 수입해 오기도 했다.

이렇게 첫 발을 뗀 귀금속기술협회는 금 부가세 면세운동(2000년)을 벌이고 귀금속 디자인 고시제도(2002년)를 처음으로 시행하는 등 귀금속업계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또 원광대, 국민대, 한국폴리텍대 등 여러 학교와 산학협약을 체결해 귀금속업계 산학협력의 지평을 넓히기도 했다.

이처럼 황 장인은 귀금속기술협회를 태동시켜 귀금속보석업계 발전을 견인하는데 큰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도 황갑주 장인은 예술에의, 작가로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예술에 매진하는 삶이야말로 더욱 가치가 있는 삶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박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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