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얼리업계 산 증인을 만나다3, 국제보석연구원 조기선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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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200회 작성일 24-05-2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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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선생님’ 대신, ‘보석업계 스승’의 길 걸어와

돈 버는 기질 타고 났으나 다 버리고, 보석업계 정상화 위해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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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과 대학생이, 주얼리 공장 청년 사장으로 

“대학생 때 우연히 보석 유통업을 하던 선배의 제안으로 합성 보석 판매 알바를 시작했다. 당시 금 한 돈에 2,300원이었는데, 하루 벌이가 금 2돈 값이 될 정도로 괜찮았다. 영업을 꽤 잘 하는 편이었는지, 선배는 자신의 사업을 계속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귀금속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국제보석연구원 조기선 원장은 처음 얼마 동안 선배를 도와 보석 판매 영업을 하다가, 독립하여 금 분석업체를 차리게 된다. 


“군대 가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물려주신 돈 30만 원과, 알바를 하면서 모은 돈들이 종잣돈이 됐다.”

그런데 금 분석업이라는 게 환경 문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이어 그는 명동에 작은 귀금속 공장을 설립하며 청년 사장이 됐다. 공장 운영은 잘 되었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 사업에 대한 회의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매점을 돌면서 보석을 팔 때의 일이었다. 간혹 어떤 커팅이 좋은 거예요 등과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러면 대충 뭉뚱그리며 점주의 구미에 맞는 답을 해주며 답변을 피해 다녔다.”

돌아와서 선배를 비롯한 업계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들에 대해 물어봤다. 그런데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당시는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보석에 관한 한 이론적인 토대가 척박하기 그지없던 시절이었다.


■ 일본 GIA 통신교육 과정 어렵게 수료

“그러던 터에 우연히 일본에서 가져온 카탈로그에서 ‘GIA 보석학’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어에 능통하신 아버지를 통해 알아보니 바로 일본에서 진행 중인 GIA 통신 교육 과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한 줄기 빛을 본 조 원장은 그때부터 일본어 공부에 돌입했다. 그리고 4년여 만에 일본어 실력 수준을 강의를 듣고, 작문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일본 GIA 통신교육 과정을 신청했다. 인터넷도 없고 국제전화도 지금 같지 않던 1979년 일이었다.

교재를 우편으로 받아서 공부했다. 맨땅에 헤딩 식이었다. 기초 지식이 없으니, 무한정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재에 적힌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광물학 책 10권을 뒤져보는 일도 다반사였다. 특히 과제가 문제였다. 과제의 내용이 부실하면 유급을 피할 수 없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모두 일본어로 내용을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제출해야 할 과제가 무척 많았다. 그때마다 한 편의 논문을 쓰듯이 광범위한 자료들을 헤집고 다녔다. 덕분에 아예 보석 분야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내가, 점차 보석학 전반에 대해 상당한 소양을 쌓을 수 있게 됐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소해야 했기에, 출석 수업을 하는 현지인들보다, 더 깊은 수준까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평소엔 국제우편으로 교재와 과제물을 교환하고, 필수적인 출석 수업이 있는 날엔 일본 현지까지 날아가 청강하는 등, 2년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정시에 마칠 수 있었다.


■ 주얼리업계의 재앙의 서곡, ‘봉인 감정서’

이윽고 1981년, 그는 ‘국제보석감정원’이라는 자신의 감정원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감정원 운영은 그와 잘 맞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힘들게 공부해서 열게 된 감정원이었는데,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선 당시 감정원들의 관행이 실제 가치보다 부풀려 감정해주는 경향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고객들이 우리 감정원에 와서도 당연히 실제 가치보다 더 높여서 감정서를 떼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런 게 나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게다가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조 원장은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감정원 운영을 포기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봉인 감정서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의 많은 귀금속 명장들의 스승으로 알려진 대구의 ‘홍길표’ 대표가 어느 날, 봉인 감정서를 두고 ‘이게 말이 되느냐’며 나를 찾아왔다. 듣고 보니 정말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애써 배운 감정학의 원리에도 위배되고, GIA는 물론 일본이나 다른 나라 감정원 시스템하고, 전혀 맞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후 조 원장 감정원에서도 바로 비봉인 감정서를 발부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고객들이 뚝 끊겨 버렸다. 부풀린 감정서 발행도 안 되는 데다, 당시 관행으로 막 자리잡기 시작한 봉인 감정서 발행도 거절했던 것이 결정타가 됐다. 하지만 조 원장은 더 이상 돈 때문에 양심을 팔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감정원은 열자마자 바로 시들해지는 신세가 돼 버렸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된 봉인 감정서는, 지금까지도 업계 전체를 언제든 공멸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부풀려진 감정서 문제도 봉인 시스템 때문에 더 증폭됐다고 볼 수 있다. 소비자에게 전달될 때까지 아무도 제품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 하에서는 의뢰인과 감정원간 담합이 무한정 가능해진다.

이 같은 봉인 감정서는 1979년 새로이 문을 연 우신보석감정원이 처음 발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신감정원은 감정업계의 후발주자 입장에서 고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봉인 감정서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미 우신감정원은 감정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 의식을 버렸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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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초창기 보석 교육의 기틀 다져 

“그러던 차에, 부산의 ‘배대기’ 대표를 비롯한 여러 분들이 강의를 좀 해 달라고 하면서 찾아왔다. 이분들하고 얘기를 나누던 중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후진 양성을 한번 제대로 해봅시다.’라고 하면서 의기투합하게 됐다. 그리고 학원을 새로이 여는 것으로 방향을 틀게 됐다.”


조 원장은 GIA 교재들을 직접 번역하고, 미국 GIA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까지 수입하여 81년 6월, 종로 YMCA에 ‘국제보석연구원’을 설립하게 된다. 조 원장이 30대 중반 때의 일이었다. 국어 선생님 지망생이, 보석 학원 선생님으로 변신하게 된 과정이다.


“당시 서울 후암동에도 보석을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있었지만 우리처럼 제대로 시설과 교재를 갖춘 곳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수강생들이 제법 많았다.”

‘국제보석연구원’은 그 후 7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보석 감정 교육 기관으로 자리했다. 이 외에 조 원장의 업적들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말로 보석 감정 용어를 정립했다는 점이다.

국문학이 전공인 그는 어렵기만 했던 외국 용어들을 수려한 우리말로 번역해 냈다. 그가 정립한 우리말 감정 용어들은 널리 사용되며 업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울러 그가 번역하거나 직접 만든 교재들도, 이후 개원하는 대부분의 교육 기관들의 주 교재로 활용됐다. 그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보석 교육의 기틀이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원이 잘 되니 여기저기서 요청이 들어와,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대구에서 5명의 사업자들 앞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강의라기보다는 강사와 수강생간 논쟁의 자리였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뜨거웠다. 강의 내용이 평소 그들이 알고 있던 상식들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쟁 같은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대구에서 가장 큰 소매점을 운영해 오던 ‘박상수’ 대표가 “이 같은 유익한 강의를 업계 모두가 들었으면 좋겠다”며 조합 사무실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5명으로 시작한 수강생은 어느결에 200-3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강사들에게 서울의 학원을 맡기고, 대구에서 두 달을 살다시피 하며 하루 8시간씩 강의를 하게 됐다. 아마 당시 대구 교동 소매업체들 치고, 내 교육을 안 받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대구에서 성황리에 교육이 이뤄지자, 전국 이곳저곳에서 교육 요청이 쇄도했다. 이에 그는 부산 범일동, 광주 충장로, 포항 등지로 옮겨 다니며, 교육을 전국적으로 진행했다.

그의 강의가 일선 사업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의 교육 내용은 판에 박힌 추상적인 이론 중심의 교육이 아니었다. 기존 영업 현장에서 잘못 알고 있던 편견들을 쉽게 탈피하도록 하면서, 직접 고객들을 만났을 때 이용할 수 있는 실전 보석 상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미 그는 어느덧 보석업체들의 훌륭한 선생님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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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주얼리 거상들 속절없이 무너진 사연 

이 와중에서 당시 조 원장의 가슴 한편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소매점들의 국제 시세에 대한 대응 방식의 문제였다.


1980년대 미국에서 다이아몬드 투기 바람이 크게 일었던 적이 있었다. 다이아몬드 업체가 상장에 성공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거품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다이아몬드 업체의 거품이 빠지면서 상장은 좌절됐고, 3-4배로 폭등했던 가격은 다시 폭락하게 됐다. 


“국제 다이아몬드 가격이 폭락했는데 국내 소매점들은 가격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다이아몬드의 질을 높여 판매하는 방식으로 폭등해 있던 가격 수준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자 커다란 문제가 생겨났다.

가격이 오르기 전에 샀던 소비자들이 오른 가격으로 다이아몬드를 되팔러 찾아오는 것이었다. 업계 특성상 되팔러 오는 소비자들을 거절할 수 없는 소매점들에게, 눈덩이처럼 손해가 쌓여갔다. 이 와중에서 그 유명했던 ‘정금사’를 비롯해, 내로라했던 유서 깊은 수많은 거상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만일 외국 시세에 연동하여 우리도 가격을 맞춰 놓았다면,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 업체들이 아직까지도 살아있을 것이고, 외국 사람들에게 우리도 장수하는 주얼리 업체들이 많이 있다고, 자랑하게 되지 않았을까.


“소비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댓가는 너무나 컸다. 그래서 내가 너무 답답한 마음에 전국에 있는 소매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 ‘한국귀금속판매업중앙회’ 설립의 단초 제공

그가 다이아몬드 가격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세미나를 열겠다고 하자 호텔 하나가 꽉 찰 만큼 전국의 많은 소매점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그가 전국을 돌며 강의를 할 때 만난 인연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미나가 바로 현 ‘한국귀금속판매업중앙회’(이후 귀금속중앙회)의 모태가 될 줄이야. 당시 이렇게 많은 소매점들이 모인 건 처음이라며, 그 자리에서 바로 소매점 단체 발기인 대회를 개최했다. 조 원장 덕에 ‘귀금속중앙회’의 첫 설립 절차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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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얼리 업계 거인’과 마주한 인터뷰

인터뷰가 끝을 향해가자 분위기를 바꾸어 가벼운 질문을 몇 가지 하게 됐다. 먼저 좋은 보석과 좋은 감정사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좋은 보석이란 대대손손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보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감정사란 양심 있는 감정사다. 감정 기술 자체는 피나는 노력으로 6개월 정도면 배울 수 있다. 그다음부터는 얼마나 정직하게 감정하는지의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간결하고 명쾌한 답이었다. 이어서 요즘 화제인 ‘랩그로운’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도 의견을 물어보았다.


“합성보석의 역사는 이미 100년이 넘는다. 출현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을 소비자들에게 정확하게 고지하지 않고, 천연인 것처럼 판매하는 행위는 큰 문제다. ‘랩그로운’이라는 용어 자체가 소비자들을 호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아무리 화학적으로 같은 물질이라 해도 엄연히 ‘천연’과 ‘합성’은 다르다.”


마지막으로 요즘 화두인 ‘AI’(인공지능) 와 함께 할 다이아몬드 감정시장의 미래에 대해서도 물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다. 커팅, 클래러티, 컬러를 보는 기계는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이 보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온전히 인간의 몫이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대체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AI’에 대한 답변을 끝으로 조원장과의 3시간에 걸친 대담은 마무리되었다. 인터뷰 내내 우리나라 보석업계를 위한 그의 헌신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분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앞장서서 싸우며 이끌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늘 내가 한 사람의 거인과 마주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조 원장의 숙원인 ‘비봉인 감정서’ 시스템이 부디 그의 생전에 자리 잡을 수 있길 바라본다. 


윤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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