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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창간 특집 | 주얼리업계 산증인을 만나다1 - ‘코멕스’ 정을용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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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354회 작성일 23-07-28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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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주얼리 업계 발전 위해서라면 뼈를 묻겠소”

1970년대 초 수출 사업으로 업계 입문, 익산보석공업단지 태동부터 평생 주얼리 업계 발전 중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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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멕스’ 정을용 회장은 주얼리 업계 원로 중의 원로다. 그를 통하면 지난 반백 년의 살아있는 역사가 순식간에 열리게 된다. 특히 그는 익산 귀금속보석 공업단지(이하, 익산보석 단지) 태동의 과정을 함께 해 왔던 인물로 유명하다. 

80대 중반의 나이(40년생)이지만, 아직도 활동력이 왕성하다. 업계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잠시도 주저함이 없다. 게다가 명료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대화에 막힘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지 재창간 기념으로, 그가 걸어온 길, 그리고 이후의 업계의 비전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본지 자문위원회 고문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야그’, ‘스트론튬 티타네이트’ 등 보석들을 들여와 재가공해서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보석들은 처음 들어 본다. 알아보니 큐빅이 나오기 이전에 개발된 모조석들이었다. 1970년 무렵,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형님과 함께 시작한 사업이었다. 원석을 수입한 후 연마해서 수출했다. 인기가 좋아서, 사업은 계속 성장했다. 
당시 익산의 보석 단지 개발이 어떻게 해서 시작됐는지에 대해 물어봤다. 

“당시 서울에 연수정 업체들의 단체가 있었는데, 그 단체에서 보석 가공단지를 조성하면 어떻겠느냐고 대통령에게 제안하면서, 보석 임가공업 수출 전망이 좋다고 말했고, 대통령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76년 이미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돼 있던 익산에 보석 단지를 개발하게 됐다. 처음에 50여 개 업체들로 시작했는데, 가장 활성화됐을 때는 사업체가 총 백여 개까지로 불어났다. 
그리고 종사자 포함 4천여 명 규모의 대규모 산업단지로 성장했다.
이때에는 큐빅이 막 개발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가격이 매우 높긴 했지만, 다이아몬드 대체석으로 수요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익산 단지는 큐빅을 수입하여, 연마 후 수출하는 임가공 중심의 산업단지로 발전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80년대 초반에는 양과 질 면에서 세계 최대, 최고의 보석 임가공 단지로 부상하게 된다. 

익산, 세계 최대 보석 임가공 단지로

이와 함께 일부 업체들이 임가공만 하는 게 아니라, 완성품도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했다. 더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큐빅을 세팅한 한국산 테니스 팔찌가 탄생하게 된다. 이 제품은 큐빅 시장이 막 열리기 시작했던 시기와 맞물려,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우리나라도 서서히 인건비가 높아지면서, 급격하게 산업단지 경쟁력이 떨어지게 됐다. 

이에 따라 익산의 대부분의 업체들은 생산 기지를 중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품 업체들 중 일부는 종로에 터를 잡았다.
코멕스도 동일한 이동 경로를 밟았다. 공장은 중국 산둥 연태로 옮기고, 도매 매장은 종로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코멕스는 수출과 공장 규모 면에서 익산 단지 내에서도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선두권에 속했다. 
이 회사의 성장세는 이후에도 계속 지속됐다. 국내외 환경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이 회사 중국 공장은 직원이 많을 때에는 50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현재는 딸 부부가 공장을 이어받아 계속 운영하고 있다. 

당대를 풍미한 코멕스의 히트 상품들

종로로 넘어온 코멕스 도매 매장 또한 골드뱅크 건물에 입주한 후, 계속 히트 상품을 출시하게 됐다. 그러면서 종로의 대표 업체로 자리 잡아갔다. 그리고 당시로는 획기적이었던 다이아몬드 커팅 주얼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전국 주얼리 업계를 달아오르게 했던 제품들을 연이어 출시했다. ‘똑딱이  귀걸이’ ‘금 자석 팔찌’ ‘삼색 주얼리’ ‘인비저블 세팅 주얼리’ 제품들이 바로 이 회사에서 처음 시작한 제품들이었다.

“세계 주얼리 업계의 트렌드, 그리고 기술 발전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도 누구보다 빨리 기술 및 디자인 혁신을 꾀할 수 있었다.” 

홍콩처럼 우리도 국제 주얼리 전시회를?

정 회장은 우리나라 주얼리 전시회에 대해서도 무척 관심이 많다. 그는 1989년 국내에서 처음 열린 한국귀금속보석시계전시회 때부터 주최 기관의 한 축으로 전시회 개최에 직접 관여했다. 당시 국내 최대 보석 단지였던 익산귀금속보석가공협동조합 이사장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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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8년과 2010년, 일정 규모의 외국 주얼리 업체들이 출품하고, 적지 않은 외국 바이어들이 참가해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익산주얼리엑스포 조직위원회 운영본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도처의 국내 주얼리 전시회는 2016년을 끝으로 다시 열리지 못했다.
외국 바이어들의 참여 뿐 아니라, 국내 제조업체들의 참여마저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해부터 다시 「서울 국제 주얼리 쇼」가 재개됐다.
전시 전문업체인 엑스포럼이 서울주얼리센터와 공동주최하여 열리게 됐다. 워낙 반가운 마음에 사전에 주최측 담당자들을 만나 전체 준비과정을 물어보기도 했다. 
아울러 실제 전시회가 열린 후에도 전반적인 진행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렵게 열린 전시회가 처음부터 만족할 수는 없다. 어렵더라도 꼭 꾸준히 이어가길 바라 마지않는다.”
정 회장은 종로를 비롯한 국내 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뭔가 결정적이고 창의적인 제품들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와중에서도 꾸준히 어려움을 돌파해나가는 선두 주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절대로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고, 정지해 있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습관적으로 새로운 기술, 디자인에 목말라하고, 갈구하고,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이들은 라스베이거스든 파리든, 어디든 정보를 구하기 위해 세계 곳곳의 박람회장을 찾곤 한다.”  

코로나가 물러갈세라, 연이어 밀어닥친 국내 경기 한파에 우리 주얼리 업계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그의 이 같은 언급은 가뭄 속 단비처럼 반갑게 다가왔다. 
현재 우리 업계의 어려움을 헤쳐갈 귀중한 한 수가 아닐까. 
정이훈 기자

***익산 보석단지, 과거 영광 되찾을 비전은

익산 귀금속보석 1단지 활성화가 핵심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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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현재의 익산 보석단지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익산시는 2000년대부터 익산귀금속보석클러스터(이하 익산귀금속클러스터) 구축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 과정에서 2002년 보석박물관을 개관한 데 이어, 익산귀금속보석클러스터 구축 1단계 사업(2008년~2012년)으로 귀금속보석전시판매센터인 주얼팰리스 건립과 보석가공단지 부지를 조성했다. 
또한 2단계 사업(2012~현재까지)으로 아파트형 공장과 디자인센터 건립, 삼기 패션주얼리클러스터를 조성했다. 
이에 대해 정 회장은 “그 동안 시는 많은 노력을 벌여왔지만, 영등동 귀금속보석 산업 1단지 주얼리 제조업체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해서 아쉽다”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일단 어느 산업이든지 제조업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렵게 돼 있다. 현재 낙후될 대로 낙후된 1단지 공단 현대화 사업을 서두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익산만이 갖고 있는 연마 및 조각 분야 등의 제조업체들이 더욱 활성화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이에 더해 익산 제조 업체들의 신제품 개발 자금 지원, 전국 소매점 초청 제품 전시회 개최 지원, 주차장 개선 등의 사업들을 펼쳤으면 좋겠다. 
이렇게 1단지 제조업체들이 활성화되면, 왕궁리 주얼팰리스는 이곳의 제품들을 소매로 판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디자인센터는 제조업체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지원을 하는 지원 센터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삼기 단지는 현재로서는 첨단 도금 시설을 활용한 고급 액세서리 제조 업체들의 거점으로서, 중국 청도 등 외국에 나가 있는 업체들의 유턴 단지로서 역할을 해 나갔으면 한다.”


***한국 주얼리 국제 전시회 성공 공식은?

지난 역대 국내 주얼리 전시회 실패, 반면교사로

”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팔릴만한 제품들을 만드는 제조사와, 그러한 제품들을 사고자 하는 소매점들의 참여가 핵심축이다. 이 양대 축을 전시장에 확실히 이끌어 들일 수 있는 대안이 중요하다.“
돌아보면 그가 직접 주최기관의 한 축으로 역할을 했던, 1989년부터 열린 서울 국제 전시회와 2008년부터 격년제로 2회에 걸쳐 개최된 익산주얼리엑스포가 실패했던 원인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국내 제조업체들이 홍콩이나 방콕, 심지어 미국 라스베이거스까지 그 비싼 입점비에 왕복 항공료, 체류비까지 내가며 제품을 출품하러 가는 이유가 뭘까. 또 국내 소매점들도 그러한 전시회에 참관하러 가는 업체들이 많다. 
그런데 당시에 그러한 제조업체들과 소매점들을, 정작 가까이에 있는 우리나라 전시회 측에서 유치하지 못했던 게 지금도 무척 아쉽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최하는 분들이 더욱 열의를 보였으면 좋겠다. 
이렇게 이들의 참여를 확보해 놓은 다음, 다른 한편 효율적인 홍보를 통해 지방의 구매력이 있는 소매점들이, 어떻게든 전시회장을 찾을 수 있도록 유인책을 강구해 나갔으면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제조업계나 소매점업계의 기라성 같은 단체들의 도움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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