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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과 인생] 박창순 금은세공 6대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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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귀금속보석신문 댓글 0건 조회 1,784회 작성일 19-05-2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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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보유 뿐 아닌 업계 발전에도 힘쓴 명장의 길

대학교 교단서 후진 양성 중, 업계 종사자들 평생교육 선도하기도


박창순 금은세공 제6대 명장은 귀금속보석업계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꼽힌다.
박창순 명장은 인천재능대학교 교수로서 주얼리디자인학과 학생 1000여명을 업계에 배출했을 뿐 아니라 업계 CEO들을 대상으로 주얼리디자인교육을 추진하는데 기여해 학교와 업계의 눈높이를 맞추는데 노력해 왔다.
또한 명동지역 귀금속보석업계 사업자등록 운동 등을 실시해 업계 양성화에도 힘썼다. 40여년 간 업계 발전을 위해 노력해 온 그의 삶의 궤적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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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전진 위한 일보후퇴로 재기 성공

우리나라의 1970년대는 농경사회에서 산업화·기계화된 사회로 변화가 일어나던 시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창순 명장은 기술을 배우는 게 좋겠다는 주위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와 묵동에 있는 귀금속 제조공장에 취업해 은제품 세공을 배우게 된다.
당시 일하는 환경은 열악했지만 은반지 만드는 일은 재미있었다. 일이 끝나고도 혼자서 반지를 만들었다. 손수 만든 은반지를 고향인 전남 구례에 계신 어머니께 보내드렸다. 동네에서 어머니의 자랑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렇게 3년 정도 일하고 난 어느 날, 회사가 부도가 나자 그는 당시 금은방들이 밀집해있던 명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여기서 은제품 뿐 아니라 금제품 등으로 세공 소재의 범위가 넓어지게 됐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는 이를 악물고 기술을 익혀 나갔다.

4년 후에는 창업을 해서 어엿한 사장님이 됐다. 그러나 영업노하우 부족 등으로 실패를 맛보게 된다. 창업을 위해서는 세무, 마케팅 등 회사 경영 전반을 알아야 하는데, 당시 그는 기술만 좋으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했다. 공장장으로 일하면서 기술력을 높여 ‘제품을 잘 만든다’라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명동에서 장사가 잘 되기로 유명했던 성보사이라는 금은방에서 귀금속 제품을 만들어 납품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는 다시 공장을 차린 후 제2의 도약에 나섰다. 그 이후로 성보당의 제품 뿐 아니라 다른 금은방들의 제품들도 만들어 공급하면서 사업은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업계 양성화의 발판 만들어

공장을 경영하다 보니 그는 업계 전반적인 상황으로 인해 임가공비나 공임이 낮을 수 밖에 없다는 문제에 주목하게 됐다. 귀금속보석업계가 가격경쟁이 심각한데다 당시에는 노동착취 또한 심각한 시대였다. 이래서는 귀금속보석 제조업 발전이 요원해 보였다.
혼자서 공임을 올리려고 해도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이하 기술협회) 등 단체 활동에 나서게 됐다. 기술협회 명동지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89년 귀금속제조업 공임인상을 위한 파업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기술협회 명동지부장을 하던 당시, 사업자등록을 내지 않고 음성적으로 운영하는 업체들을 설득해 중부세무서에 50여개 업체가 사업자등록을 내도록 이끌었으며, 또 본인 회사부터 먼저 자발적으로 세무신고를 하기도 했다. 이에 기술협회 명동지부는 명동세무서로부터 업체들의 세금 부과 업무를 위임받기도 했다.

명장은 업계의 공헌자

우리나라 명장제도는 1991년을 기점으로 전국기능경기대회 명장부 우승을 통해 실기 위주로 선정하는 방식에서 기술력과 연구개발 실적, 업계 봉사 등을 서류로 평가하고 현장 심사하는 제도로 개편됐다. 박창순 명장은 지난 1997년 지방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또 디자인개발 의장출원 등을 통해 연구개발 실적도 인정받았다. 특히 업계에 평생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는데 기여한 점도 높이 인정받았다. 이에 2000년 제6대 명장으로 칭호를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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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순 명장의 귀금속 교육현장에서의 활약

실기능력 갖춘 인재 1천여명 업계에 배출


1990년대 귀금속 제조업자들의 기술력은 뛰어났지만 이론적인 부분이 부족했으며 귀금속공예나 주얼리디자인 관련학과를 졸업하고 업계에 나온 학생들은 이론에는 능통했지만 실기에는 약했다. 이에 따라 업계 차원에서는 다양한 디자인기법을 활용한 고급화를 추구하기 어려웠으며 학생들이 업계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재교육이 필요해 소모적이었다.


이에 박창순 명장은 오원택 서울산업대학교(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와 의기투합해서 업체 대표들이 이론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과정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하여 한국귀금속판매업중앙회, 기술협회의 후원과 정부 지원을 받아 귀금속공예최고전문가과정(이하 전문가과정)을 여는 데 공헌했다.

지난 1997년 박창순 명장은 업체 대표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전문가과정 1기생으로 이 과정을 수료했다. 그 이후 이 과정은 업체 대표들이 학문의 폭도 넓히고 인맥도 쌓을 수 있는 과정으로 정평이 나 지난 2017년까지 운영이 지속됐다. 약 20년간 업체 대표들을 귀금속디자인 전문가로 키워내는 전당의 역할을 해 온 것이다.

한편 그는 2000년 명장이 된 이후 2001년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와 동신대 등에서 강의를 하다가 지난 2005년 인천재능대학교 주얼리디자인학과 신설 당시 전임교수로 자리를 잡게 된다. 동신대에 남을 것인지 재능대로 옮길 것인지 고민을 했지만 그는 업계 출신으로서 본인의 역량을 더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전문대라는 생각에 이직을 결정하게 됐다.

박창순 명장은 학과 교육과정을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내용으로 구성했다. 특히 앞으로 캐드디자인이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 캐드 교육을 도입하기도 했다. 학과가 신설된 2005년부터 학과가 통폐합된 2016년까지 1천여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이들은 업계 곳곳에서 업계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 나가고 있다.

현재도 그는 유통물류학과에서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학비 전액을 지원받아 산업체근로자들을 상대로 운영하는 일학습병행제 2년학사과정을 2017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업계에 좋은 인재가 영입돼야 업계가 발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재가 업계에서 자리를 잘 잡을 수 있도록 처우를 개선하는 등 업계 차원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박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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